** Written by airen. Copyright by airen(2003.7)
천안문 사건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한 리포트.
근현대사가 복잡하지 않은 국가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중국만큼 복잡하고 독특한 근현대사를 가진 국가가 있을까?
흔히 중국의 근현대사는 특이하다는 단어로 대표된다. 그러나 ‘무엇이’ 특이한지에 대해, 왜 그럴 수 밖에 없는가에 대해 아는 것이 없어 그저 특이하다고만 생각했다. 그 후, 아주 우연한 계기로 천안문 사건에 대해 자료를 찾아보면서 이런 사건을 경험하고도 여전히 건재한 중국 사회주의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되고, 천안문 사건 바로 이전의 상황을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중국 근현대사와 중국 특유의 사회주의의 흐름과 특성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러면 지금부터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전의 근대사를 바탕으로 중국 혁명의 승리에 대해 생각해 본 후, 천안문 사건에 대한 생각을 정리해 보겠다.
1911년 이전까지 중국을 이끌어 온 중요 황제 제정 시대의 중국은 ‘지방의 지주이면서 국가 관료’로서 부와 명예를 모두 갖춘 신사층이 주도하는 유교적 사회였다. 이 사회에서는 과거에 합격하여 관료가 되는 일이 더 중요했기에 기술의 발전에 대한 관심이 적었고, 상공업을 농업보다 천하게 여겼기에 자본가 계급이 성공할 수 없었다. 같은 시기 유럽에 비해 우수한 문화와 과학 기술을 가졌던 제국은 그 이유들로 인해 19세기 후반부터 무너지기 시작했다.
요소들은 중화제국을 2000년 이상 유지시켜주었으나, 19세기 초 아편 전쟁의 패배는 오랜 기간 중국을 이끌어 온 원동력에 대해 의심을 품게 했다. 체제는 유지하면서 국가의 경쟁력을 끌어올릴 지식인들의 여러 시도에 만족할 수 없었던 농민들은 적극적으로 봉기를 주도하거나 참여하며 기존 체제에 대한 불만을 강하게 드러냈다. 중국인들은 1911년 일어난 신해혁명으로 황제 제정이라는 기존 체제를 뒤엎는데는 성공했으나, 지배 계급이었던 신사층의 도움을 받았기에 과거의 보수적 사회가 그대로 유지되어, 무정부 상태나 군벌 지배와 같은 혼란기를 맞이하였다. 엘리트 위주의 혁명은 하층 계급이 품고 있던 불만을 제거하는데도 실패했다. 혼란기를 거쳐 국민당이 세워졌지만, 쑨원 사후 집권한 장제스 일파의 무능하고 부패한 정치 때문에 국민당은 대중의 신임을 잃어 갔다.
국민당의 실패가 공산당의 성공으로 이어진 것은 흥미로운 역사적 필연이었다. 초기 중국 공산당은 마르크스 규정에 따라 '도시 노동자를 근거로 한' 혁명을 시도했다. 그러나 장제스의 백색 테러와 1927년 상하이 노동자 봉기 등의 사건을 거치며 중국의 상황에서는 노동자를 바탕으로 한 혁명이 '불가능'하며 공산당 자체의 군사력이 필요함을 깨닫게 된다. 국민당을 지지하는 세력이 농촌의 지주와 도시의 자본가였기에, 그들은 국민당에게서 소외된 노동자와 농민으로 눈을 돌렸다. 탁월한 실용주의자였던 마오쩌둥 일파는 농민에게 주의를 기울여 모든 토지를 몰수하여 다시 분배하는 급진적인 토지 정책을 바탕으로 농민의 지지를 끌어낸다. 그 시기 그들은 농촌 개혁을 효율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대중의 참여와 지도를 결합시키는 일이 어렵고 복잡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과격하고 급진적이던 장시 소비에트 시절을 거쳐 전설적인 대장정을 성공한 중국 공산당은 연안 소비에트 시절을 맞게 되고, 연안 소비에트는 이전보다 온건하고 성공적인 정책 실시로 많은 농민들의 환영을 이끌어 낸다. ‘ 간소화된 중앙집중적 지도부와 지방의 재량 확대가 결합된 이원적 통치는 일방적인 권위주의와 관료주의를 완화시켰다. 농민의 경험을 공유하기 위해 당 간부들은 농촌으로 내려갔으며, 대중들의 생각을 표출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마련되었다. 호조조와 합작사, 대자보 등의 중국 사회주의 특유의 대중적 의사 표출 방식은 이후 문화대혁명 기간에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대중에서 나와 대중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당시의 대중 노선은 중국 사회주의 정치의 중요한 특성이 되었다. 또한 이 시기에 일어난 항일 전쟁을 통해 무능한 국민당을 누르고 주도 세력으로 급부상했다. 지리한 내전을 거쳐 국민당에 대한 환멸을 공산당에 대한 환호로 이끌어낸 중국 공산당은 1949년 중국인민공화국의 건국을 선포한다.
대단히 불리한 조건에 있었던 중국 공산당이 그들이 원하는 혁명을 이루어낸 것은 거의 기적에 가까운 일이다. 그러나 기적도 사람이 만드는 법. 그들의 성공에는 이유가 있었다.
이전까지 농민들이 겪은 가혹한 억압과 생활사는 중국 공산당에게는 기회였다. 초기에 그들 농민의 지지를 이끌어 내기 위해 많은 시간과 돈을 낭비한 공산당은 훗날 그때의 경험을 토대로 실질적이고 물질적인 이익을 제공하는 개혁을 실시하여 농민 이외의 광범위한 계급과 집단의 지지를 이끌어 냈고, 이는 1949년 건국 이후에도 공산당을 지탱하는 중요한 받침이 되었다. 당시 중국 정치의 분열과 일본의 침략은 수많은 중국인들에게는 불행한 일이었지만, 공산당에게는 하늘이 준 기회였을 것이다. 당시의 중국 공산당은 하늘이 준 기회를 잘 이용하여 ‘당시에는 이러한 전략만이 가능했다’ 유일한 전략적 가능성이었고, 우연적으로 그것이 성공으로 이어졌다 해도, 기회를 이용하여 성공으로 이끌어내는 것이 쉽지는 않다. 그런 의미에서 그들 자신이 역사를 만들어 내었다‘는 스카치폴의 표현을 인용했다.
그들의 힘으로 새로운 역사를 만들었다.
이렇듯 중국 공산당의 초기 역사는 이제까지의 역사를 뒤엎으며 시작되었다. 이것은 중국 정치의 운명을 예고하는 것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이후의 중국 정치 역시 당 지도자가 막강한 권력을 지니고 있음에도 수도 없이 심각한 정쟁에 휘말려 많은 희생자들이 나타나고, 다시 그 희생자가 권좌로 올라서는 역사를 반복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이를 증명하는 인물이 바로 덩샤오핑이 아닐까? 중국 정치에 대해 관심을 갖기 전에는 ‘덩샤오핑’에 대해 많은 중국 관련 보도들이 말하듯 중국의 개혁 개방을 주도해 온 키가 작은 사람이라는 사실 정도밖에 몰랐지만, 중국에 대한 책을 읽고, 전공 수업을 들으며 그가 얼마나 주도면밀하고 무서운 사람인가 깨닫게 되었다.
그가 이끄는 지도부는 1978년 11기 3중 전회를 통해 주요 직위를 장악하고, 권력을 이용할 준비를 시작했다. 덩샤오핑 지도부는 그들 자신이 모택동 지도부의 원칙이었던 계급 투쟁의 희생자였다. 그들은 모든 인민들이 계급 배경으로 인해 고통을 받지 않도록 계급 배경과 상관없이 보장하는 정책을 실시하여, 1978년 말 이후, 계급 투쟁 중심의 논쟁을 끝내버렸다. 이렇게 새 지도부에 걸맞는 인재를 키울 제도적 방패를 마련한 후, 새로운 기업가 계급이 나타나 시장 지향적 경제를 발전시킴으로써 그들은 성공적으로 목표를 달성했다.
그들은 가장 먼저 모택동주의 이념, 정치, 정체, 제도 등에 대해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하며 그것을 새로운 무엇으로 대체해야 한다고 믿었다. 1980년 11기 6중 전회까지 그 이전의 마오이스트들은 그들이 쥐고 있던 권력을 내놓아야 했고, 그 자리를 덩샤오핑파가 채웠다. 문화대혁명 기간 이후 그 자신이 가장 극단적인 희생자였던 덩샤오핑 지도부는 적대적인 상대에 대한 극단적인 공격을 피하여 빠른 시일내에 중국 정치를 정상화시켰고, 그들의 위치가 확고해지자 현명하게 이념 문제로 관심을 돌려, 모택동주의를 이끌어 온 지도 원칙인 계급투쟁을 덩샤오핑 시대의 원칙인 ‘사회주의 현대화’의 방향으로 전환시켰다. 이런 표현을 쓴 것은 이유가 있다. 빠른 시일내에 정치적인 지위를 확보하고, 자신들의 경제 전략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이를 실천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 정치적인 문제에 있어서는 ‘일부러 그렇게 하지 않은’ 듯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후 덩샤오핑은 정치 개혁적인 부분에 있어서는 보수적인 경향을 드러내었고, 천안문 시위에서 그를 가장 분노하게 한 것은 ‘시위대들이 독자적이고 자율적인 기구를 조직하려 한 것’이었다 한다.
모든 것이 2년 반이라는 짧은 기간안에 이루어졌고, 이들은 그렇게 자신들의 정책을 추진할 힘과 사람들의 기대를 얻어냈다.
덩샤오핑 시기의 중국을 살펴보면 재미있는 점이 발견된다. 전진과 후퇴를 반복하며 진행된 경제 구조개혁과는 달리 정치 개혁은 더디게, 혹은 역행하면서 진행되었다는 것이다. 이에 사람들은 정치적인 변화를 요구하기 시작했고, 덩샤오핑 지도부는 강경한 억압으로 대응했다. 많은 사람들이 분노하고 있을 때, 팡리즈는 ‘권력 남용을 막기 위해서 권력은 분산되어야 하며, 결정은 공개적으로 이루어져야 하며, 의견차이는 정당한 방법으로 대응해야 하고, 자유 언론은 보호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현대 중국을 찾아서 2, p. 321, Jonathan D. spence, 1998 이산) 이는 민주주의, 개인 주권, 대중 주권의 ‘전면적인 서구 민주화’를 요구하는 것이었고, 당시 사회에서 공식적으로 인정된 정치적 논의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이었다.
중국의 천체 물리학자 팡리즈는 사람들을 자극하는 발언을 했다. 1987년 초 후야오방 총서기는 이러한 말이 나올 수 있는 정치적 분위기 조장과 지나친 경제 성장을 추구함으로써 발생한 심각한 물가 인상에 대한 책임을 떠안고 물러났다. 덩샤오핑 일파는 이제 심각한 부작용과 정치적 반대를 초래할 것이 분명한 가격 개혁을 추진하려 했다. 이에 학생들이 시위를 벌이고, 노동자들이 파업을 하자, 덩샤오핑 지도부는 가격개혁을 취소하였고, 경제 정책은 시장의 역할이 축소되고 국가 통제가 강화되는 보수적인 방향으로 흘러갔다. 그들은 이제 경제개혁을 위해 민주적 정치 개혁을 포기하고 신권위주의를 채택했다. 그렇게 1989년 새해가 밝았다. 심각한 위기 상황 속에서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마오쩌둥 시기로의 회귀거나 서방화였다. 지식인들은 끊임없이 정치범들의 석방을 요구했고, 학생들은 시위를 계속했다. 1987년 4월 후야오방의 사망을 계기로, 1만 여명이 넘는 학생들이 팡리즈의 발언에서 시작된 1986년의 시위와 후야오방의 역할을 재평가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후야오방의 장례 기간에 천안문 광장 인민대회당에서 리펑 총리와의 면담을 요구했으나 거절당하자 시위를 지속했다. 1987년 4월 26일, 시위자들에 대한 강경한 정부의 입장이 인민 일보를 통해 공식 발표된 그 날 학생들은 단체를 결성하였고, 학생들의 저항감은 더욱 커졌다. 5월이 되어 하위 관리, 상점주인, 노동자, 언론인에 이르기까지 시위에 참가하자, 덩샤오핑 지도부의 전술은 바뀌었다. 자오쯔양은 시위대의 분열을 바라며 ‘이성적이며 ’민주적이고 합법적으로‘ 행동할 것을 요구하는’ 연설 내용을 발표하였고, 정부는 이성적으로 행동하고 있으니 더 질서있는 정치적 변화를 위해 더 기다려달라고 설득하였다. 이처럼 변화하는 과정에서 불행하게도 시위대와 지도부는 분열하기 시작했다. 시위대는 정치적 상징물과 고르바초프의 방문은 30여년 간의 중국과 소련 사이의 불화를 끝낼 수 있는 기회로서 서방 언론들의 주목을 받았다. 영악한 학생 시위대는 이를 이용할 줄 알았고, 그들의 의도대로 베이징 이외에 사는 나머지 중국인들과 세계인들에게 주목을 받았다.
고르바초프의 중국 도착을 취재하러 온 서방 언론을 이용하는 교묘한 기교를 선보여 더 많은 시위자를 끌어들였다. 5월 16일 자오쯔양은 시위를 그칠 경우 진압하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하였고, 시위 참가자 대부분은 승리를 확신하며 해산하고자 하였다.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평화적이고 미래 지향적인 결말을 깨뜨린 것은 소수의 극단주의자들이었다. 그들에 의해 분노한 강경파 지도부는 6월 3일 밤과 4일 새벽에 걸쳐 대량 학살을 지시했다. 우리가 아는 천안문 사건은 그렇게 불행하게 끝났다.
이후 중국의 정치 개혁은 깊은 겨울잠을 잤다. 외형적으로는 관료 부패를 엄중히 처단하는 등의 변화를 보였지만, 여전히 중국 사회와 국가 간의 대립은 남아있다. 그들은 지금 분명 평온하다. 그러나 그것이 평화롭다는 의미거나 정치적 안정을 보장해주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화인민공화국과 공산당은 여전히 건재하다. 아마도 중국인들은 문화대혁명과 천안문 사건을 통해 국가를 위협할 정도의 심각한 정치적 불안을 경험했으며, 당시의 지도부와 그 뒤를 이은 지금의 지도부가 경제를 발전시킴으로써 그들이 정치적 정당성을 입증하고, 반대파들의 입을 다물게 했기에 불만스럽지만 지금 그들을 영도하는 중국 공산당의 정책과 제도를 따르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천안문 사태와 관련한 책을 읽다가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역사적으로 서구적 개념의 시민 사회가 존재하지 않았던 중국인들은 1989년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를 하면서도 어떤 학생은 그것이 무의미한 구호라고 생각했고, 어떤 학생은 예비 후보자 명부로 선거를 치르는 정부의 구태의연함에 강력하게 반발했다. 학생들은 선거는 합법적인 정치 사상을 완벽하게 가장한 것이라고 주장했고, 또 다른 사람은 5․4 운동의 중심이었던 ‘과학과 민주주의’를 통한 해방의 두 번째 구성요소라고 생각했다. (Jonathan D. spence : 현대 중국을 찾아서 2, p. 324, 이산 1998)
정확한 민주주의의 개념을 알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민주주의를 요구하면서도 중국은 형식적으로는 비공산주의 계열의 정당이 존재한다. 그러나 그들의 정치적 역할은 없다. 그저 외형상 다당제를 유지하기 위해, ‘보여주기 위해’ 존재할 뿐이다.
다당제 도입에 대해서는 논하지 않았다 한다. 그저 지금의 지도부가 아닌 새로운 지도부의 등장과 정치 구조의 변화를 원했을 뿐.
천안문 사건은 비록 그들이 원한 정치적인 민주화를 이끌어내지는 못했지만, 분노한 대중의 힘을 간과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중국 정부에게 알려주었을 것이다. 그런 연유로 나에게 천안문 사건은 ‘반쪽짜리 성공’으로 기억되었다.
현대 중국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궁금해지는 것들이 있었다.
농민들은 무슨 이유로 그토록 공산당을 지지하며, 지주들을 심판하였는가? 문화대혁명은 단순히 우둔한 대중의 광기였을까? 1989년에 일어난 천안문 사건의 시위자들은 무엇을 원하여 그들의 목숨을 버린 것일까? 중국이 아닌 다른 어떤 나라에서도 일어난 적이 없는 사건들을 겪은 중국이 여전히, 건재한 이유는 무엇일까?
단지, 신문 기사 몇 줄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해답을 얻을 수 없는 의문들이었는데, 국정 수업을 듣고 중국에 대한 책을 읽고 난 후 그 의문들에 대한 조그마한 해답을 얻게 되었다.
한 학기동안 중국 국정 수업을 들으면서, 그 동안 잘 몰랐던 부분에 대해 많이 알게 되었고, 어렴풋이 알고 있었던 내용을 좀 더 세밀하게 볼 수 있었다. 첫 시간에 이 수업에서 중국 국정에 대한 세세한 지식이 아니라 우리가 중국을 어떻게 인식하고 바라볼 것인가에 대한 방법을 얻어가라고 하셨던 선생님 말씀이 떠오른다.
이 수업을 들은 후 나에게 새로운 습관이 생겼다. 중국에 대한 기사가 신문에 실리면, 낯설지 않게 그 내용을 받아들이고, 내가 배우는 언어를 쓰는 나라로서의 중국이 아니라, 격정적인 20세기를 지나 21세기를 맞이한 이웃 나라로서의 중국에 대해 한 번 더 생각해 보게 된 것이다.
중국에 대해 알게 될수록 중국은 예측하지 않고 이성적으로 분석해야 하는 나라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나는 여기에 하나를 더했으면 한다. 모든 세계인들이 관심을 가지고 중국을 꾸준히 지켜보는 것. 그렇게만 된다면 1989년 6월의 비극은 다시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 참고자료 >
서진영, 현대중국정치론. 나남신서 1997
李澤厚+劉再復, 김태성 역, 고별혁명, 북로드 2003
마크 블레처, 정환우+전병곤 역, 반조류의 중국, 돌베게 2001
조너선 D. 스펜스, 김희교 역, 현대 중국을 찾아서 2, 이산, 1999
그 외의 많은 참고 자료들..
at 2003/12/03 2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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