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 엔디야그 10주차, 3번에 한번꼴로 받는 카본 레이저 치료는 꽤 따갑고 아프다. 그러나 치과 치료를 받고 나니 이 정도 아픔은 아픔도 아니게 되었다. (긍정적 사고!)
오후 1시부터 5시까지 옥상 카페 '하늘정원'에서 보냈다. 근처 빵집에서 산 치즈 베이글과 얼 그레이가 오늘의 점심 메뉴. 아마드 얼 그레이는 좀 쓴 편이라는데, 내 입맛에는 맞았다. 지난번에 책 빌리면서 이름과 전화를 적어드렸더니, 사장님께서 내 이름을 기억하고 불러주셨다. 게다가 요즘 라떼아트를 배우신다며, 연습해봤는데 어떠나면서 사진 속 라떼를 공짜로. 어머 사장님 센스쟁이. 커피를 마셔도 모양이 유지되는 게 신기해서 여쭈어봤더니 그래야 제대로 된 거라고. 빵집에서 사 온 머핀을 앞에 놓고, 이런저런 주제로 수다를 떨다가 어쩌다보니 마무리는 드라마 '대왕세종'과 최만리에 대한 이야기로. 다음에 세종에 대한 책을 빌려드리기로 약속했다.
저녁 5시부터 8시 30분까지 과외. 그러고 보니 지금 과외하는 세 명 다 여학생. 기본적으로 공부를 싫어하는 아이들은 아니라서 가르치기 편하다. 여름방학부터 같이 공부한 여고생이 말하길, 9월 수능 모의고사에서 외국어 점수가 소폭 올랐단다. 게다가 듣기 문제가 좀 더 잘 들린다고. 만쉐이. 넌 아직 1학년이니까 지치지만 않고 꾸준히 하면 3학년이 되어 좋은 성적을 받을 수 있다고 말해주었다. 성격이 급한 아이였는데, 이제 내 속도에 적응이 되었는지 느긋하게 기다릴 줄도 안다. 이거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아직은 모르겠다.
얼 그레이 한잔, 카페라떼 한잔, 과외할 때 받은 맥심 모카골드 한잔, 하루에 카페인 음료를 세잔이나 마셨더니, 새벽을 뜬눈으로 지새고, 6시 넘어서야 잠이 들었다. 기상 예정 시간은 9시 40분.
일요일 과외 때문에 요즘은 휴일 기상시간이 더 이르다. 아침 10시 30분부터 1시 30분까지 과외. 중학생, 고등학생 모두 내신 준비기간. 요즘 교과서 컬러풀하더라. 고등학교 교과서까지 그럴 줄이야, 새삼 놀랐다.
점심도 거르고 잠시 눈을 붙였다가 저녁 5시가 넘어서 오라방과 외출. 다른 건 다 혼자 하겠는데, 이상하게도 옷은 혼자 못 사러 가는 나. 삼십년 가까이 살았는데, 이 청바지가 내게 제대로 맞는지 아닌지도 몰라, 아놔. 오라방이 골라온 청바지 4종류를 다 입어보고 그 중에 가장 마음에 드는, 나는 있는지 없는지도 몰랐던 버커루라는 브랜드의 바지 선택. 바지를 입어보니 허리가 줄어든 건 맞던데, 그럼 뭐하나. 허리가 살짝 헐렁해도 허벅지와 종아리 때문에 한 치수 아래는 엄두도 못 내는 저주받은 하체의 소유자인 것을. 그 사실을 잘 아는 나라서 웬만하면 좀 넉넉하게 입을 수 있는 바지를 원했는데, 허벅지에 여유가 생기는 순간 그 청바지와의 인연은 다한 것이고, 그때부터 방심하면 다시 살이 찐다는, 오라방의 확고한 패션 철학이 반영된 바지로 결국 골랐다. 가을에 입으라면서 이쁜 언니 얼굴 있는 자주색 얇은 후드티도 사 준 센스쟁이 오라방. 오라방이 입는 옷은 하나같이 감각있고 멋지다. 나는 그런 스타일을 소화할 능력이 안 되므로, 그저 쳐다만 볼 뿐. (오늘 우리집에 놀러올 때 입고 온 민소매 티도 이뻤다. 코데즈 컴바인 거라고 했나. 오라방 요즘 달리기와 농구 오덕 모드라, 옷태가 아주.) 미각도 예민한 오라방이 추천한 돼지김치찌개도 맛있었다. 맹신하면 곤란하겠지만, 아무리 봐도 황소자리 남자의 미적 감각과 탐미주의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것 같다. 그런 남정네를 하나도 아니고 둘을 아는데, 난 왜 센스가 이 모냥?
*
자폭성 뱀다리. 마음에 드는 스타일의 옷이 있어서 물어봤더니 남녀 공용도 아니고, 남자 옷이란다. 이건 뭐 무늬만 여자도 아니고, 하드웨어는 XX인데, 소프트웨어는 XY? 아놔. 지금부터 옷의 세계에 빠져서, 같이 옷 사러 다니자고 말하는 패셔너블 쇼핑 고수 오라방의 센스를 닥치고 흡수해야 할 듯.
마을버스를 타고 집 앞까지 같이 와서 오라방과 작별 인사를 나누고, 동네 노래방 고고싱. 남은 방이 하나밖에 없다며, 가장 작은 방값만 내고 들어간 그 방은... 대충 봐도 30명은 앉아서 놀 수 있을 듯한 특실. 여기라도 괜찮겠냐는 주인 아주머니 말씀에 고개만 끄덕끄덕. 그 후 1시간 30분 동안 관객 없는 단독 콘설. 신곡 몇 가지 부른 뒤에 효신냥과 뮤즈 새 음반 발매 기념으로 두 카수 노래만 불렀는데, 원음(남자키)으로 놓고 불렀을 때는 100점, 여자키로 불렀을 때는 85점이라는 난감한 결과가. '좋은 사람' 여자키 버전은 처음 불러봤다. 믿거나 말거나. 불러보니 음정 맞추기는 훨씬 수월한데(내가 생물학적 여자니까 당연한 건가), 이 곡 특유의 우울한 느낌이 살지 않는다. 게다가 점수도 80점대. 이거 뭐야? 음정도 훨씬 더 정확했고, 소리도 더 크게 낸 것 같은데.
*
효신냥의 무대를 보고 오라방은 비주얼이 오스칼(!) 같고 여운이 있는 곡이라 좋다하는데, 내가 보기에는 아무리 봐도 혈통있는 귀족 세바스찬 3세 삘에, 심심한 곡. 누가 팬이고 아닌지. 그래도 나 그 시끄러운 식당에서, 네 목소리 한번에 알아들었다. 이래뵈도 아직 네 팬이야, 효신냥.
최근 덧글